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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현성당사제관 (下牛峴聖堂司祭館)

소재지 의왕시 원터아랫길 81-6 지자체의왕시 종별경기도 기념물 제1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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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기념물 제176호로 지정(등록)된 날2001년 1월 16일이며 관리주체는 천주교수원교구이다.

   

청계산과 광교 산맥을 잇는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는 하우현(下牛峴)성당은 서울에서 약 24떨어져 있고 안양시와는 20리 거리로 근접해 있다.

이 곳은 옛날 동양원이라는 역원(驛院)이 있던 곳으로 현재 원터라고도 불리운다.

   

하우현 일대에 언제부터 교우들이 모여들어 살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이 지방에 청계산과 광교산 등 높은 산들이 있고

거기에 형성된 자연의 계곡과 울창한 수목이 박해를 피해 산길을 찾던 천주교인들에게는 더 할 나위 없는 피난처였음에 비추어

어느새인가 교우촌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교우들이 때로는 땅을 파고 토굴 속에서 살던 곳이었다고 하여 '토굴이'라고도 불리웠다.

 

1884년에 하우현은 공소공동체의 모습을 갖추고 뮈텔(Mutel)신부 등이 정기적으로 순방하여 전교하였다.

이때까지도 한국 천주교회는 박해하에 있었기 때문에 뮈텔 신부는 상복으로 변장하고 은밀히 하우현을 방문하였다.

 

1886년 한불조약의 성립으로 한국 천주교회에는 신교의 자유가 허용되기 시작했다.

이 조약이 비준된 이듬해인 18887월 왕립(갓등이)이 최초로 본당으로 승격하여 하우현의 모()본당으로 하우현까지 관할하였다.

 

1893년 공소 초대 회장으로 김윤중(베드로)이 선출된 기록이 있으며,

 

18945월 왕림본당 2대 신부인 알릭스(Alix) 신부는 하우현 신자들이 공소 강당없이 교우 집에서 공소 예절을 행하는 것을 보고 강당 신축을 강력히 권고한 결과,

알릭스 신부가 협조한 금액과 하우현 교우들이 모금한 1,500냥으로 초가 목조 강당 10간이 건축되었으며,

 

1900년에 하우현은 왕립 본당에서 분리되어 본당을 독립하였다.

   

1965년 김영근 신부는 성당 건물이 퇴락하여 붕괴 위험이 있음을 보고 미군부대 건축자재 원조로 현재의 성당을 신축하였다.

하우현은 본당 설정 이래 본당 폐쇄가 거듭 되풀이 되고 타 본당에 귀속된 공소였던터라 사목 활동이 활발하지 못했었다.

   

하우현은 현재 200여 명의 신자수로 교우촌을 형성하고 있는 작은 본소에 불과하나 본당 역사 100주년을 맞은 유서 깊은 역사를 가진 성당이며,

 

1906년 신축한 사제관은 2001122일 경기도 기념물 제176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3, 측면 2칸의 사제관은 몸체는 석조이고 지붕은 골기와를 이은 팔작지붕 집으로 된 절충식 건물이다.

20세기 초반에 성당의 사제관을 한양 절충식이 채택된 것은 드문 경우며 평면 및 구조, 의장 등이 갖는 건축사적 가치가 높다.

   

 

★ 역사탐색 : 병인박해(丙寅迫害)

 

1866(고종 3)부터 1871년까지 계속되었던 우리 나라 최대 규모의 천주교 박해이다.

 

이 박해는 네 차례에 걸쳐 파동으로 전개되었다.

첫번째는 1866년 봄에,

두번째는 1866년 여름에서 가을까지,

세번째는 1868,

네번째는 1871년으로 이어져 도합 8,000여 명 이상의 순교자를 내었다.

 

1868년의 세번째를 무진사옥, 1871년의 네번째를 신미사옥이라고 부르기도 하나 대원군에 의해 계속 추진된 것이므로 병인박해에 포함시키는 것이 통례이다.

따라서 병인박해는 병인년(丙寅年)1866년 한 해의 박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뒤 6년간에 걸친 박해를 모두 지칭하는 용어이다.

   

대원군은 원래 천주교에 대해 묵시적으로 이해를 지녔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천주교 박해령을 선포하고 장기간에 걸쳐 박해를 강행하게 된 데에는

서양세력의 침략적 접근에 따른 국가적 위기 의식과 정치적 반대세력의 비난에서 벗어나 정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방책이 숨어 있었다.

   

1860년 애로우호사건(Arow號事件)에 따라 톈진조약(天津條約)이 맺어지고 러시아가 연해주 지방을 차지하게 되면서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과 러시아는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그 뒤 러시아는 자주 두만강을 건너와 통상을 요구하게 되는데,

대원군을 비롯한 정부고관들은 이에 당황하였고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이 때 김면호(金勉浩홍봉주(洪鳳周) 등의 천주교도들이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아책(防俄策)을 건의하여 대원군의 정치적 관심을 끌게 되었다.

 

승지(承旨) 벼슬을 지낸 남종삼(南鍾三)은 대원군에게 한불조약을 체결하여 나폴레옹 3세의 위력을 이용하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보다 구체화시키기 위해 조선에 체류하고 있는 주교 베르뇌(Berneux, 張敬一)와 만나볼 것을 건의하였다.

 

대원군은 만약 러시아를 물리칠 수 있다면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겠다는 암시를 주어 천주교도들은 매우 기뻐하였으나

지방에 가 있던 베르뇌와 주교 다블뤼(Daveluy, 安敦伊)가 서울에 도착한 것은 한 달이 지나서였고 대원군의 처지는 급격하게 바뀌어 있었다.

 

그 이유는 우선 18661월에 도착된 북경사신의 편지에서 영불연합군의 북경함락 이후 시작되었던 양인살육(洋人殺戮)의 사실이 보고되었다는 점에 있다.

   

청나라의 천주교 탄압의 소식은 반 대원군 세력으로 하여금 천주교와 접촉하고 있는 대원군에게 정치적인 공세를 취하게 하였고,

이에 대원군은 정치적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쇄국양이와 사교금압의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더구나 운현궁(雲峴宮)에도 천주교가 침투했다는 소문이 퍼져 조대비(趙大妃)까지 천주교를 비난하기에 이르자 대원군은 천주교 탄압을 결심하고 박해령을 선포하였다.

   

18662월베르뇌를 선두로 홍봉주·남종삼·김면호는 물론 정의배(丁義培전장운(全長雲최형(崔炯) 등 대표적 교인들과 다른 수천명의 교인들이

서울 및 그 밖의 지역에서 잡혀 순교하였다. 이 때 베르뇌·다블뤼 등 9명의 프랑스 신부도 체포되어 서울 새남터와 충청남도 보령의 갈매못에서 순교하였다.

   

이렇게 박해가 치열해지자 피신해 있던 신부 리델(Ridel, 李福明)7월 조선을 탈출,

청나라의 톈진으로 가서 프랑스 동양함대 사령관 로즈(Roze,p.G.)에게 구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에 로즈는 10월에 7척의 군함을 이끌고 프랑스 선교사들의 학살 책임을 묻는 무력시위를 벌이게 되어 병인양요(丙寅洋擾)가 발생하였다.

   

이 병인양요로 말미암아 박해는 제2단계에 들어가게 되는데,

대원군은 국가적 위기의식을 고조시키면서 천주교도를 통외초구(通外招寇)의 무리로 내세워 수많은 천주교인을 처형하였다.

이 때 대원군은 양이의 발자국으로 더럽혀진 땅은 그들과 통하는 무리의 피로 씻어내야 한다고 주장하여 처형지는 주로 서울과 해안지방으로 정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박해는 18684월에 일어난 오페르트(Oppert)의 충청남도 덕산 남연군묘(南延君墓) 도굴사건을 계기로 다시 불이 붙어

내포지방을 중심으로 대량 학살이 일어났다.

오페르트는 수차에 걸친 통상요구가 거듭 거부되자 대원군 아버지의 분묘를 도굴할 계획을 세우고 작업을 펴나갔으나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이에 대원군은 크게 분노하여 내포 지방의 교인들을 대대적으로 색출하였다.

내포지방은 천주교회 창설기부터 천주교가 유포된 지역이었기 때문에 많은 희생자를 내었고 부근의 지방까지 피해를 입었다.

그 뒤 1871년의 신미양요(辛未洋擾)로 다시 박해가 가중되었다.

   

신미양요는 1866년 평양시민의 공격으로 침몰된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의 사건을 미국이 정치적으로 이용,

조선에 포함외교(砲艦外交)를 펴고자 하면서 시작되었다.

   

미국함대의 강화도 공격을 시발로 하여 6일간의 전투 끝에 결국 미국은 물러가게 되었고,

격퇴에 성공한 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국민에게 철저한 쇄국양이의 국시를 선명히 하는 한편 잔존해 있는 천주교인을 색출하여 처형시켰다.

그 뒤에도 탄압이 계속되다가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하자 병인박해가 마무리되었다.

   

우리 나라 최대의 박해이고 가장 많은 순교자를 낸 병인박해는 천주교의 박멸이라는 국내 정치적 측면만이 아니라

급격하게 밀어닥치는 서구 식민세력에 대한 대항이었다는 점에서 1801년의 신유박해나 1839년의 기해박해와는 다르다.

   

병인박해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천주교는 1886년 한불조약 이후 다시 회복하게 되었으며,

1968년에는 병인박해 기간중에 순교한 24명이 복자(福者),

1984년에는 성인(聖人)으로 오르게 되었다.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기록은 1890년 주교 뮈텔(Mutel, 閔德孝)이 자료를 모아 간행한 치명일기가 대표적이다.

 

   

◈ 참고문헌 ◈

 

1. 포도청등록(捕盜廳謄錄)

2. 일성록(日省錄)

3. 고종치하 서학수난의 연구(유홍열, 을유문화사, 1962)

4. 병인박해자료연구(최석우, 한국교회사연구소, 1968)

5. 한국천주교회사(샤를르 달레, 안응렬·최석우 역, 분도출판사, 1980)

6. 한국교회사의 탐구(최석우,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 자료출처 ◈

 

1. 문화재청

2. 의왕시청

3. 경기관광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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