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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보고가(李天輔古家)

소재지 가평군 하면 연하리 226 지자체가평군 종별경기도 문화재자료 제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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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문화재자료 제55호로, 지정된 날1984년 9월 12일이며 관리주체는 연안이씨 종중이다.

 

조선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진암 이천보(16981761)가 살았던 집이다. 당시 건물은 모두 소실되고 현재 있는 건물은 고종 4(1867)에 다시 세운 것이다.

한국전쟁으로 안채는 모두 불에 타 버렸고 지금은 사랑채와 행랑채만 남아 있다.(문화재청)

 

사랑채는 경기지방에서 많이 나타나는 평면형태로 하지 않고 보다 옛식인 ''자형으로 정면 6, 측면 1칸 반으로 동향이다.

뼈대는 높은 기둥과 들보로 구성하였고, 단면이 사각형인 납도리를 올려놓아 서까래를 받치고 있다.(가평군청)

 

제일 왼쪽의 하부에 궁판을 둔 2칸의 누마루를 두고 그 오른쪽으로 전면에 반칸의 퇴칸을 두고 방, 대청, 방의 순으로 연이어지고, 제일 오른쪽 1칸은 부엌을 두었다.

이러한 사랑채의 평면구성은 경기지방의 주택에서는 흔하지 않은 예라 할 수 있다.(경기문화포털)

 

누마루쪽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고 부엌쪽은 옆면 지붕선이 사람 인()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기단과 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은 이천보가 살았던 당시의 것으로 추정한다.(문화재청)

 

잘 다듬어 쌓은 장대석의 두벌대 기단 위에 높이가 1자 가량 되는 사다리꼴로 다듬은 주춧돌을 놓았다.

목조건물은 고종 때 지은 집으로 보이는데 비교적 나무를 정교히 다듬고 공간구성도 짜임새 있게 되어 있다.(가평군청)

 

* 궁판 : 문의 아래 부분에 낮게 끼워 댄 나무판

 

 

★ 인물탐색 : 이천보(李天輔), 1698(숙종 24년)1761(영조 37년)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의숙(宜叔), 호는 진암(晉庵). 일상(一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성조(成朝)이고,

아버지는 옥천군수 주신(舟臣)이며, 어머니는 김만기(金萬基)의 딸이다. 문학에 힘써 당대에 이름이 높았다.

생원시에 합격, 내시교관으로 있다가, 1739(영조 15)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740년 정자가 되고 교리·헌납·장령 등 언관직을 역임한 뒤 1749년 이조참판에 올랐다.

그 뒤 이조판서·병조판서 등을 거쳐 1752년 우의정에 승진하고, 같은 해 좌의정에 올랐다가 영돈녕부사로 전임되었다.

 

1761년 영의정에 올랐으나 장헌세자(莊獻世子)의 평양 원유사건(遠遊事件)에 인책, 음독 자결하였다.

담론을 잘하여 허식을 차리지 않고 남과 희소(喜笑 : 즐겁게 농담함)하기를 즐겼으며, 시에 뛰어난 재질을 보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저서로는 진암집(晉庵集)84책이 있다.

 

 

★ 역사탐색 : 사도세자사건(思悼世子事件)  

1762(영조 38년) 5월 사도세자가 부왕인 영조에 의해 뒤주 속에 갇혀 질식사한 사건.

임오년에 일어났기 때문애 임오옥(壬午獄)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은 노소당인(老少黨人)들의 정쟁(政爭) 과정에서 노론에 의해 세자가 희생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조선 후기의 당쟁은 탕평책이 추진되는 속에서도 보다 심각한 국면을 드러내게 되었다.

영조는 진성왕후 서씨와 계비 정순왕후 김씨에게는 소생이 없었고 영빈이씨 소생으로 효장세자와 사도세자가 있었다.

효장세자가 요절하였으므로, 영조는 1749년에 사도세자로 하여금 대리청정하게 하였다.

 

그런데 세자가 대리청정을 맡기 전까지는 영조와 성격상의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효심과 우애심이 두터웠고,

왕세자로서의 도량과 덕을 겸비하여 영조로부터 극찬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리청정에 임하게 되면서 세자는 행동에 형평을 잃고, 비정상적인 성격이 나타나 영조로 하여금 세자에게 국정을 맡길 수 없다는 생각을 굳히게 하였다.

이보다 부자간의 대립 관계가 표면화된 것은 영조가 병석에 있을 때 신하들이 세자에게 약을 권하도록 종용하였으나 이를 거절한 일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결국 영조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고, 세자를 보좌하던 소론(少論)의 영수였던 이종성(李宗城)이 탄핵을 받아 조정에서 물러나게 된 때부터이다.

 

1761년 세자는 임금도 모르게 관서지방을 유람, 순행하고 돌아오자 윤재겸(尹在謙) 등이 상소해 세자의 행동이 체통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영조는 세자의 관서순행에 관여한 자들을 모두 파직시켰다.

영조가 세자를 참살한 또 다른 계기는 17625월에 세자의 실덕과 비행을 고발하는 나경언(羅景彦)의 무고 사건과

문소의(文昭儀) 등의 부자간의 이간책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 영조는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하고, 세자와 영빈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뒤주에 가두어 죽게 하였다.

영조가 뒤에 이를 후회하고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린 것으로 보아 사건의 계기가 된 부자간의 불신과 이간은 노소론의 당쟁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남인·소론 등이 부왕 영조와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세자를 앞세워 보수적인 성격이 짙은 노론 정권의 전복을 꾀하다가 실패한 사건이라고 생각된다.

 

 

참고문헌

 

1. 영조실록(英祖實錄)

2. 정조실록(正祖實錄) 

3.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4. 강한집(江漢集)

5. 진암집(晉庵集)

6. 조선후기당쟁사연구(이은순, 일조각, 1988)

7. 조선후기 당쟁의 종합적검토(이성무 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2)

 

◈ 자료출처

 

1. 문화재청

2. 가평군청

3. 경기문화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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